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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노상자/하고 싶은 말

외조모상 장례일기


화창했던 4월 29일,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아이패드 공연을 했다.

내 저서인 '나는 아이폰 아이패드 앱으로 음악한다' 저자공연이었는데,

내가 활동중인 아이패드 밴드 bpm 156과 함께 아이폰 아이패드 합주를 했다.


신곡이었던 벚꽃엔딩의 반응이 좋아서 뿌듯했다.

앵콜요청이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어서 앵콜을 하지 못 한게 아쉬웠다.


좋은 기분으로 뒷풀이를 하는데 청천벽력같은 연락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계신 외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마침 그 병원 근처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집에서 왔으면 빨라도 한시간 가까이 걸렸을 거리인데, 택시로 곧바로 도착했다.


하지만 외할머니께선 이미 임종하신 뒤였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어쩌면 술때문에 감성이 더 풍부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어찌 손 쓸수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요양중이셨기에, 다들 준비는 하고있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 없이 입을 벌리고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보니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장례절차가 시작되었다.

상주는 나와 6살 차이가 나는 장남인 외삼촌.

외가에 오래 붙어있었던 나였기에 외할머니든, 외삼촌이든, 이모들이든 다들 각별했기에, 나 또한 주도적으로 장례를 도와야 했다.

휴가때문에 회사에 알리고 집에 잠시 들어왔다가, 3시간정도 자고 일어나 복장을 갖추고 병원에 왔다.

술을 많이 먹었어서 몸은 상당히 힘들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곳들에 돈이 들어가는지, 비용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어떤 부분들을 신경써야 하는지 등...

내가 주로 맡은 것은 조의금을 넣는 함 앞에 앉아 안내를 하는 일.


그리고 두 분의 도우미 아주머니는 큰 도움이 되었다. 요청하길 잘 했다.


알게 모르게 돈 들어갈 일이 참 많다. 

또한 장례 관련 사업은 현금 결제가 많고 아무래도 깎으려고 들기 어렵기 때문에 사업성으로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화환도 많이 들어왔는데, 내 회사의 화환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주)클앱스튜디오 라는 이름을 통해 처음으로 화환이 나온 것. 나와 같이 이 회사를 차린 대표형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작년 이맘때였으면 다음커뮤니케이션 이름으로 화환이 오고 다음 로고가 박힌 일회용품들이 잔뜩 나왔겠지만, 이런걸 아쉬워할 때는 아니지.



잠을 못 자고 장례 절차를 치룬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내가 잠을 안 자고 뭔가를 오래 해본 것은 청년성서모임 연수봉사였는데, 버금가는 체력적 소모를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청년성서모임 연수봉사는 3박 4일 동안 5시간정도를 잤던 것 같다. 


손님들이 예상 외로 많이 다녀가셨다.

나는 외조모상이므로 따로 부르지 않았기에, 회사에서만 다녀갔다. 그래도 전 임직원이 와주시니 감사할 따름




3일째 입관을 하는데 다시금 눈물이 났다.

내 눈물의 가장 큰 동기는 엄마였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때문에 그렇게 슬퍼하셨고, 나도 그동안의 추억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났던 것.

감정이 정말 부족하여 모든 걸 이성적으로 생각해버리려는 내 성격에 눈물이라니 가당치 않았지만, 이 기간만은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추모공원에 화장을 위해 도착했는데, 정말 잘 만든 곳이었다.

화장비용이 9만원이었는데, 그렇게 잘 차려놓은 건물 유지가 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화장이 끝나고 뼛가루를 모아 관의 못을 자석으로 제거하고 기계로 빻았다.

그렇게 나온 외할머니의 흔적을 유골함에 담아 할아버지가 계신 용인가족공원으로 이동했다.

가족묘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같이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삼오제(요즘은 삼사제로도 많이 한단다)를 위해 다시 들른 산소

내 차를 움직여야 하는 상황. 운전을 많이 했다.


뒤를 돌아보니 날씨가 참 맑다. 비 소식이 있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아래와 같은 글을 쓴 지 일주일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2012/04/22 - 용인공원에서 외할아버지를 추억하며


그래서 다시 이 곳을 찾게 될 줄이야.



결과적으론 그동안 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포스팅을 했던 내 블로그에도 며칠간의 결석이 생겼다.

그리고 간만에 쓰는 첫 글은, 이렇게 발행되지 않은 장례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