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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심리상자

자살이란 죽음을 스스로 부여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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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란 죽음을 스스로 부여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한다. \"자기 스스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실행한다는 의미이다.\"

이 자살을 크리스트교에서는 단호하게 비난하였고, 철학에서는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 이때 철학의 작업은 자살에서, 인간적 삶의 의미와 자유가 \"생애의 긴\" 드라마 속에서 만나는 점을, 분명하게 구별하게 한다.

따라서, 플라톤(Platon, 428-348 av. J-C.)과 같은 철학자는 자살을 신들의 의지에 반대하는 불경건한 행위로 생각하다(『파이돈』편과 『법률』편에서), 이와 반대로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 수동적으로 변형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죽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제자이기도 했고 황제였던 네로로부터 배척 당하고서 자살하여 죽도록 명령을 받은 세네카(Sénèque, 4 av. J-C.-66)는 이렇게 말한다. \"가끔 인간을 죽음으로 밀어 부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그런데 현자는 삶에서 달아나지 않고(ne s\'enfuire pas), 거기에서부터 벗어난다(sortir, 떠난다).\" 여기서 자살에 대한 도덕적 가치는 자살을 합당하다고 여기게 하는 기준의 평가에 근거한다.

\"사람이 현명하게 판단하고 또 현명하게 살기란 어렵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자살을 현자의 기회로 삼는다. 철학자 들뢰즈도 그런 점에서 스토아적이라고 할까? - 그럴까?

불교에서도 각승(깨달은 자, mandian)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고 한다. 이 각승이 스스로 먼저 떠나지 못하는 점에서 비극이 있다. 중생과 더불어 떠난다는 것, 미륵불로 상징되는 이 떠남은 인간의 4고(四苦)중의 첫 번째 비극이라는 것은 네팔 불교의 특징이며, 대승불교에서 생(生, 태어남) 첫 번째로 꼽는 것과 차이점이 있다.

대승의 불교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도자(식자)층과 연관이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종교의 전파는 항상 상위 성직자(신비가)들에게 설득력을 가진 후에야 인민(대중)에게 전파된다는 것이다. 각승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지위를, 단지 은퇴가 아니라 스스로 떠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일상적 삶조차 떠난다는 것은 이 굴레를 벗어나서 다른 곳을 가는 것 즉 또 하나의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떠남은 사실상 큰바다에 서서 더 이상 오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줄 것도 없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생성)태어남을 말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생성)태어남이 과거의 모습을 유지 보존하고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과거의 어떤 모습과도 다르게 나온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형성체의 생성이 있고. 거기에 희망 즉 욕망이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칸트(I. Kant, 1724-1804)의 도덕론에서 결코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 주체의 의지가 사라진다는 정도에서 보면, 자살의 인정이란 도덕성 자체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 초현실주의 운동\"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 1896-1966)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에 기초한 예술적이고 지성적인 운동\"은 낭만주의(romantisme)에 이어서 자살 속에서 자유 행위를 보았고, 또한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의 생명 도약(élan vital)에 대립하여 지상의 현세를 넘어서 가는 \"죽음 도약(élan mortel - René Crevel{1900-1935}의 용어)\"보았다. 반면에 까뮈(A. Camus, 1913-1961)는 자살을 단죄하였다. 왜냐하면 자살이란 시지프스(신화)의 예에서 드러나는 각성(lucidité)과 용기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와서, 뒤르껭(Durkheim, 1858-1917)과 더불어 자살이란 사회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의 적용의 대상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자살을 사회적 연결이 느슨해지면서 일어나는 무질서한 현상으로 분석한다.

\"연결 고리가 끊어진 주체가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무인도에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무인도에서 살 수 있다는 설화는 일정한 기간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 일정한 기간이 자신을 사회로 복귀시킬 수 있다는 가능에서 생존을 이어간다. 감옥에 갇힌 자가 감옥에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생명의 애착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복귀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체가 타자와 연관에서 자신의 위상이 없는 자아는 자신의 소멸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관계나 연관의 단절은 이미 몸과 얼의 단절로서 상해 또는 죽음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한 자아가 주변과 연관이 끊어졌다는 것은 질료 형이상학적으로 잘려짐 즉 생명의 단절로서 죽음이다.\" \"마실에서 천하루밤\"


(제 1회 철학대회를 위해 준비했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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